텅빔에서 채움으로 (룻 4:7-22)
오늘 말씀은 룻기의 결론을 통해서 나오미 인생뿐 아니라 밥 없는 밥집(1월10일 룻기강해 제목)이었던 베들레헴이 텅빔에서 채움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성도님들의 텅 빈 삶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단 위에 섰습니다.
보아스의 요구(9-10절)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왜 보아스는 베들레헴 장로들과 사람들에게 너희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룻은 율법으로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된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철저히 하나님의 율법을 신뢰하고 그 율법대로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룻이 베들레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동의와 승낙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11절)
베들레헴 장로들과 사람들은 룻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승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의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일까요? 신명기의 율법은 모압 사람을 금지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는 율법을 뛰어넘어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이미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압 여인 룻은 하나님의 백성이 보이지 못하던 헤세드(사랑)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율법을 잘 아는 자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모든 율법을 아우르는(성취)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가 바로 룻이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고국 땅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섬기고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룻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잘못이라고 성경은 말할 수 없습니다. 룻기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있고 베들레헴 장로들 사람들도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헤세드를 본 그들이 “우리가 증인이 되겠다” 승낙하고 있습니다.
룻을 축복하다(11-12절)
11절과 12절에서 베들레헴 장로들과 사람들이 룻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인정하면서 진심으로 룻을 축복합니다.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시조를 낳은 라헬과 레아입니다. 여인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룻을 올려놓고 칭찬해주고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보아스에게 상속자를 주셔서 보아스의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해달라고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은 계대결혼을 합니다.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다말의 인생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어지는 요셉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지대한 역할을 한 유다의 희생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 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베레스를 통해 보아스뿐 아니라 다윗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보아스와 룻을 축복하는 베들레헴의 장로들과 사람들이, 다말과 유다의 일을 아는 그들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베레스의 가문을 사용하시고 축복하셨다면 엘리멜렉의 가문을 더 축복해주세요” 룻을 통해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밥 없는 밥집에서 교회다운 교회로(룻기 1장, 4장)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 될 수 있고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랑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바뀐 자들의 모임이 이 땅에서 유일한 교회입니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1장 1절의 모습은 밥집에 밥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떠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자 소견대로 살던 사람들 엘리멜렉과 나오미도 교회는 다녔지만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으로 갔지만 그 땅에서 다 잃어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나오미가 룻과 함께 돌아옵니다.
그런데 4장에서 베들레헴(밥집)에 하나님의 사랑이 장로들과 공동체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여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살맛나는 공동체, 힘을 얻는 공동체, 위로를 얻는 공동체, 교회다운 모습을 회복한 에브랏 베들레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신 8: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나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와 나의 삶 속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사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삶,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도들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성도들 삶에서 텅빔은 하나님께서 이 훈련을 하시는 것이고 여러분이 통과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나의 텅빔을 채워주는 핵심입니다.
베들레헴 교회도 똑같이 하나님 말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룻이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삭줍기 율법으로 이삭줍기 하러 나갔고 계대결혼이 있으니까 계대결혼 하러 나갔고 기업 무름이 있으니까 기업 무름을 요청합니다. 단순합니다. 유력한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보아스가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을 살린 것은 룻과 보아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의 헤세드(사랑) 율법의 완성을 보였을 때 공동체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장로들과 사람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지만 그곳에서 참된 생명 회복이 일어납니다. 아무개는 세상에서 똑똑한 자입니다. 행복하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희생하지 않으니까요. 성경은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백성,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십자가(희생)의 복음입니다.”
베들레헴의 여인들(룻 4:14-15, 17)
여인들이 룻기 1장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룻 1:19) 4장에서는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룻 4:14-15) 예배의 회복과 교회의 회복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17절에서 그의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아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오벳의 뜻은 ‘섬기는 자’입니다. 나오미를 비방하고 조롱했던 그 여인들이 나오미의 가족을 축복해주며 오벳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이름을 받습니다. 오벳을 통해 다윗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임재가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1장 텅빔의 상태에서 2, 3장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헤세드가 보입니다. 마지막 4장에서 선명한 그림으로 설명하십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 4:16 1장에서 아무 것도 없던 나오미의 품에 이제 아기가 있습니다. 아기는 생명입니다. 보아스의 헤세드와 룻의 헤세드가 만나 그들의 희생을 통해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의 결정체입니다. ‘난 너와 함께 하고 있었어. 나는 너를 채우고 너를 새롭게 할 너의 아버지 너의 하나님이야’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위해 아기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기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생명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품에 안겨주셨습니다.
텅빔이 채워지니 나오미는 인생의 사명이 생깁니다. 내가 이 생명을 잘 키우리라, 내가 이 생명을 잘 지켜내리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을 품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양육자’라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남편, 자녀, 나의 병, 시어머니 그 모든 것들을 향해서 그들을 섬기는 양육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로마서 8:32, 37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빌 4:11-13(표준새번역)
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룻기의 메시지
한 마을에서 이삭을 주울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가족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보아스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누군가를 섬겨야하는 일이 힘들지만 그 양육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십니다. 텅빔에서 채움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