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3:1~10 “아직 소망은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에 양심을 울릴 때
아멘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에 양심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마음에 소망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삶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양심에 소리가 들려올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개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소망이 있는 사람이란?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이다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은
오늘에 주어진 삶에 시간을 가지고
오늘일에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삶이란?
하루하루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즉 절망을 생각하며, 그 절망을 바라보며 절망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젊음이 있을 때는
그날이 영원하리라 생각하고 육신의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삶이다
그러나 뜨는 해가 있으면 지는 해가 있듯이
사람은 제한된 시간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분류에 삶이 있다면
이도 저도 아닌 막연하게 그날그날에 만족하며 허성 세월을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
성전 미문(화려한 문)에 앉아 있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은 육신이 걷지 못하는 것을 떠나서
그 영혼마저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즉 영적인 맹인이 아닌가?
주어진 현상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엇인가 해보려는 노력도 없이 살아가는 삶
참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그 사람은 살아 있으나
비참한 삶, 굴욕전인 삶,
영혼마저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어가서라도 그 미문을 넘어 하나님을 만나보기를 원하는 노력마저 하지 않는 삶
누가 주면 먹고,
누가 그 자리에 앉혀주면 구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 앞에, 지척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소망을 생각해보지도 바라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자신을 자포자기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새”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러 가는 시간에
성전 미문에 앞에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구걸하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모든 소망이 사라진 환경에서 자포자기하고
구걸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베드로는 무엇을 생각 했을까?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말씀하셨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찾아오셨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구차한 생명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에게서
바닷가에서 거물을 내리며 소망 없이 살아가던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소망 없이 살아가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베드로에 마음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나는 참 소망을 모르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내 이웃에게
베드로와 같은 심경으로 손을 내밀고
하나님의 복음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있는가? ???????
6~8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 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키는 베드로…..
일평생 일어서서 걸어보자 못한 사람이
예수의 소문을 들은 대로
베드로를 보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역사하시는 순간이 아닌가?
믿고 순종하는 곳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게 되고
그 소망의 기쁨을 누리며 기뻐 뛰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한사람……..
그러나 그 사람이 베드로의 바라보지 않았거나
베드로가 말할 때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하여
적개심을 품고 베드로를 외면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 본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구원에 이르러
예수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기뻐 뛰며
성전안으로(은혜의 강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신앙인에 양심을 따라 살기 원하는 나의 삶속에서
나의 영문 밖에서 내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내 영혼이 맑은가?
아니면 육신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내 신앙에 양심의 소리마저 들을 귀를 닫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려와도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에서
육신이 원하는 것이 없어 하나님의 복음을 멀리 하고 있지는 않는가?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가
그 순간을 놓쳤다면
그에게 어제 또다시 그런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때를 놓치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주님과 함께하는 베드로의 손길이 아니었는가?
나는 나의 삶의 모습이
아직도 나는 내 육신의 욕망이 원하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상전안으로(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영혼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저주저 하거나
영문 밖에서 부르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 신앙에 양심을 두드릴 때
마음의 문을 닫고 외면한다면
그 영혼은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 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부활의 믿음에 확신이 있기에 그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지고 가심 같이……
바울 사도가 사형언도가 내려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형제들에게 담담하게 옥중 서신을 쓸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그 마음에 충만하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신의 옷을 입고 이세상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부족한 종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속에서
참소망의 기쁨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종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아버지~~ 부족한 종에 영혼이 깨어 있어
영문 밖에서 부르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에 귀를 주시며
그 음성이 들려올 때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아멘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종이 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뛰어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아버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고난이나 역경이 찾아올 때
그 현실에서 낙담하거나 낙심하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헡 틀어진 종에 믿음을 연단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아버지~~ 성경통독을 읽기를 진행하면서
기록된 말씀에서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보고 읽으면서,
제자도의 길이 무엇인지,
목자에 사명이 무엇인지,
종의 사명과 신분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아 알아가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종이 되여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감사 찬송 드리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낙심하고 낙담하여 소망이 없는 나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십자가에 사랑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주님,,,
그 사랑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종이 되게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2024/10/29 - 김 성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