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맹인 “바디매오”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막10:46~52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다)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맹인 바디매오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것이니라”(잠8:17)
이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그 길을 지나가기를 얼마나 간절이 기다렸을까?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부르짖지 않았을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나의 기도가 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기 원하며 하나님앞에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우리들에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시고 성령으로 오셨어 믿는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고 함께 계시며
믿음의 백성들을 의의 길로 인도 하시기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결같이 함께 하시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은혜를 망각하고,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어제 같이,
무덤덤하게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 보고만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이…..
한치 앞을 모르고 걸어가는 이 세상 길이…. 낭떠러지 향해 걸어가는 것 같고,
불나방처럼 죽을 줄을 모르고 불속으로 걸어가는 것 같은 나의 모습이 아닐까?……..
어둠이 가득한 세상속에서 한치 앞을 볼수 없을 때
내가 애타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야 할텐데…..
하나님의 자녀인 내영이 잠들어 … 자신이 죽음의 길로 가는 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는가?
성령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둠속에서 낭떨어지로 걸어가는 나를 바라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애타게 부르시고 계시는데
나는 세상에 취해 성령하나님 음성이 들려 와도
내 생각 내 기준, 내 잣대를 가지고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내 영혼이 깨어, 내가 영적 맹인이 었던 것을 깨달아 알고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님을 찾을 때
하나님아버지는 나를 안으시고, 어루만지시며 위로하시고
그 공로를 나에게 돌리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노라 하시지 않을까?
왜” 바울 사도가 날마다 죽어야 주님을 만날수 있었을까?
자신의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죽었을 때
빛되신 하나님을 볼수 있어 의에 길로 갈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바라보고 존경한다 하면서도,
나 자신의 존재가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 자신이 교만하여 나를 나타내고자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궁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네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남은 자는 살륙당하리라”(이사야14:30)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레셋을 멸망시키실 때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고자 하는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 되이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자는
그 뿌리까지 멸망 하리라는 말씀이 아닌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 할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수 있지 않는가?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은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의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 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느해미야9:9~10)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 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여호수아4:19)
인생길 한발한발 내어 딛는 발걸음 앞에 보이는 현상과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백성들에게 홍해 같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거나
여리고 성 같은 장벽이 그들을 막고있다 할지라도
의에 길로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수 있지 않았는가?
우리들의 인생길 앞이 이와 같은 길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성도는 먼저 하나님앞에 물어 가로되 기도하는 습관이 될 때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수 있지 않을까??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사무엘상 28:7)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 왕이 된 자 사울왕이
하나님 보다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들을수 있는 것을 찾을 때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고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 하나님을 만날수 없지 않았는가?
왜”일까 그 영혼이 잠들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육신의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것 때문에
그는 영적인 맹인이 되여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 하지 않았는가?
그 결과는 그가 생명의 빛을 볼수가 없어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는가?
성도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 올수록 그 영혼이 깨어 있어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그 음성이 들려 올 때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것이다
사람이 절망가운데 있다 한들, 맹인 “바디매오” 보다 더 절망 가운데 있을까?
그의 나이는 알수 없으나 그는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긴 세월을 기다렸을까?
그러나 오늘 이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몸을 성전 삼고 함께 하신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 영이 깨어 있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할 때 응답받는 것은 확실하지 안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줄로 알고 믿으라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묵상할수 있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 할수 있는 좋은 환경을 주셨는데
그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에서 살아갈수 있는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더 큰 은혜가 있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 하시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내 삶을 뒤돌아 볼 때
세상에 보이는 것에 미혹이 되여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앞에 부끄럽기 그지 없다
“주의 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 13:33)
하나님 아버지~~
믿음없는 이 죄인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깨어 있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올 때
순종할수 있는 믿음과
감사 할수 있는 믿음의 종이 되게 인도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
2021/2/2 - 김 성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