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5:25~34 (초라 하다고 느낄 때) (혈루증 앓는 여인)(5:21~43)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들어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 함일러라
29 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낳을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초라 함을 느낄 때” “뒤에서 받은 은혜” “부끄러움을 배려 하는 은혜”
예수님께서는 회당 장 “야이로”의 청함을 받아
야이로 딸의 병을 고치려 가는 길목에서 혈루증 을 앓고 있는 여인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시대에 혈루증 을 앓고 있는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다
사람을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그 여인이 만진 물건 까지도 부정하다 하던 시대였다
병들어 제산은 없어지고 육신에 힘이 없어 쓸어질 것 같은 몸으로
자신을 숨기고 수 많은 무리들을 헤집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믿음)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사람들 가운데서 외면을 당하고 그들과 한자리에 함께 할 수도 없는 여인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자유를 선포 하시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사랑이)가 아닌가?
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열등감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딸로 살라고 선포 하시는 순간이 아닌가?
나의 삶 속에서…. 나에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주저하는 일이
사람들 앞에서도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 딸의 생명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여인의 생명도 귀중하게 여기시기에
병든 몸으로 무리들을 헤치며 힘겹게 다가오는 여인의 걸음에도
보조를 맞추어 주시며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 사랑………..
그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비록 세상에서 스팩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 하여 좋은 환경에 자란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보조를 맞추어 주시고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내가 바라볼 수 있는가?
내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 현상과 현실에서 주눅들어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는 것이
율법 앞에 들어난 나에 죄 성을 누가 알까 봐
주변에 이목이 두려워 지레 겁을 먹고 포기 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내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과 현실을 넘어 에서 나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 것을 믿는 믿음에 확신이 있다면
주저함 없이 일어나 달려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믿음에도 때로는 확신이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는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넘어 가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수 많은 무리들에게 살아서 둘러 쌓인 예수님을 만나기 까지 넘어가야 할 산이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여인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과 현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인은 세상에 모든 것을 (율법=굴레) 뛰어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닌가?
율법이 심판하기 위한 규범이라면
그 율법을 통해서 나에 죄 성을 발견하고
그 죄를 용서 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 할 때
하나님은 그 법 아래 있는 우리들을 자유 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닌가?
자유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용서와 사랑…..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아닌가?
일어나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은혜를(사랑을)입을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은혜를 느낄 때 무한한 사랑을 받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지 않는가?
자격 없는 자신을 비관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가 없다
나는 비록 갖춘 것도 없고 죄로 얼룩진 인생,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몸 하나
그 육신의 건강도 마저도 탕진한 인생 이기에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혈우증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닌가?
주님은 주저함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에게 치료에 능력을 보내시지 않았는가?
내가 내 힘, 내 지혜, 내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한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같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무리들 속에, 속하는 사람들과 같은 종교인은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성도 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늘 목사님 말씀 중에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가 언제였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내 육신의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 졌을 때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망각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 교회를 찾았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다 망가진 몸으로 세상사람들에게 격리 수용 되여 있으면서 까지도
자아가 살아 있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마저도 마지막 절규에 불과 함을 느낄 때
나를 찾으시고 나를 안으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았는가?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아무 쓸모 없는 사람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격리 대상의 사람이 아니었는가?
내가 나 자신을 부인 하고(내려놓고) 그분을 의지 할 때, 나는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부인할 때가 많았다
그때가 언제인가? 내 안에 내 자아가 살아 날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가 필요 했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왜 예배가 필요한가?
하나님 과의 소통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물어 가로되
아버지에 뜻을 묻는 자녀가 되어야 그 은혜 안에서 사랑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며 기쁨의 감사가 식어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자아가 살아나고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방식대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며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기를 원하는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알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랑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혈루증을 고침 받은 여인이 아닌가?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지만
나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갔을 때나
요단 강을 건너 갔을 때, 그 때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깨어 있다는 것은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다 ………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첫 사랑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나님과의 첫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십자가에 사랑이라면, 주건 없는 사랑이 아니었는가?
부모님과의 첫사랑도 십자가에 사랑과 유사한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 바탕 위에 있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은혜에 감사 하는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은혜 안에서 울러 나오는 사랑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사랑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랑에는 조건부 사랑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랑 안에서, 감사 함으로 행함이 있는 곳에,
더 큰 은혜와 사랑이 넘쳐 나지 않을까?
하나님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 드립니다
귀한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느꼈던 그때를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그 사랑 안에 있음을 더 깊이 알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은혜와 사랑 안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 합니다 – 아멘 --
2019/11/14 - 김 성 하 –
*나는 오늘도 생각하게 된다
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라 하시는지……
감사 하며 깊이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본다 ………………………
l (말씀 집회 자리를 마련해 주신 담임 목사님과
말씀 집회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더 사랑의 교회를 섬기시는 이 인호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