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35~43 (두려워 낙심될 때)
36절 “예수께서 그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장당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 하시고”
나에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수 많은 무리들이 함께 듣고 수군대며 나를 바라본다면
또 그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말을 한다면…….
나는 나에게 이런 상황이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예수님도 별볼일 없어, 하고 예수님에 손을 뿌리쳤을까?
아니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따라 갔을까?
기도 할 때 마음이 평안 할 때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나 보다 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가고 있는 현실을 맞이 할 때가 많지 않는가?
성경 말씀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다르게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견대로 행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는가?
하늘에 별을 보게 하시고 바다에 모래알 같이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갈대아 우르 에서 불러 내셨는데 가는 곳 마다 가시밭 길이 아닌가?
수 십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릴 만 할 때
아브라함이 나이가 백세를 바라보고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는데
마므리 상수리 나무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창 18장) 또 약속을 하시지 않는가?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의 약속을 받고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집으로 가는 도중이 아닌가?
가는 길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바라보는 마음이 얼마나 다급하고 조급했을까?
야이로의 마음과는 달리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다 행하시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회장당의 종으로부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는가?
그때 야이로에 마음은 어떠했을까?
순간 믿음 흔들리며 주저앉고 싶으며 예수님이 원망 서럽지 않았을까?
야이로에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조용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36)
육신의 귀로 듣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야이오에 마음은 어떠했을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하나님 앞에 기도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기도를 했는데(야이로가 예수님께 간청을 했는데)
내 육신의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너무나 다른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 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천하 태평 같지 않는가?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 하시고 현실은 다르게 전개 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현상이 우리들이 흔히 쉽게 말하는 시험일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쉽게 시험이라 말 할 수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직접 닥칠 때는 마음에 크나큰 고통이며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상과 현실을 넘어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 따라 순종 하며 따라가고 있는가?
내 삶 속에서 가장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 하면서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나는 알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의지 하고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목사임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 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 하면서….. 믿습니다..하고는
이루어 질까 말까? 다시 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에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 여정에서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영적인 눈과 마음으로 창조주를 찾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것이 아닌가?
내 안에서 나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성령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따라 순종하며 함께 걸어가는 믿는 사람의 인생에 여정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수 십 년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약속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할 때
“하길”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방법이기에 아브라함에게서 내어 쫓으라 하시지 않는가?
인생에 여정에 순간순간 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사람 생각의 방법을 내려 놓으라 하실 때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에게 마음에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만나 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 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았는가?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도 아브라함 보다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복잡한 심정으로 주님의 손을 잡고 걸어 가지 않았을까?
육신의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것 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까지 예수님과 동행 할 수 있었고,,,
동행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았는가?
말씀을 믿고 함께 동행 했기 때문에
혈루증 여인이 바라본 예수님을 “야이로”도 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인생에 여정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동행 하심을 믿고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순간순간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를 바라고 원하며 기도 하고
그 때가 언제쯤일까 생각 하며 기다리고 있는 자기 중심적인 믿음인가?
(이런 모습의 삶은 하나님을 시험 하는 것이며 나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닐까?)
한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때와 나에 때가 다르며 하나님의 방법과 나에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혈루증 걸린 여인이나 야이로가 보았던 예수님이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에서나 마므리 상수리 나무 곁에서 만나던 하나님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에 몸을 성전 삼고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동일 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것이 믿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두렵고 떨리지만 그 성령님에 손을 믿는 마음으로 굳게 잡고
야이로 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바라보고 따라가느냐?
아니면 인생길 중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에 몫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건강하게 보이지만
혈루 증을 앓는 연약한 여인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죽었다는 딸이 있는 집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야이로 와
수 많은 무리들 중에는 무엇이 있고 없는가?
야이로 는 볼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던(믿음을) 것을
그들이(믿음을) 가질 수 없고(하나님의 은혜)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신뢰 하는 것과 신뢰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으로(신뢰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혈루 증 걸린 여인과
그리고 그 여인을 바라본 회장당 야이로 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빌라도 광장에서 고문을 당할 때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제갈 길을 같으나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며 따라가는 사람이나
그 무덤을 지킨 여인들은 그 때 그 여인들이나 야이로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온전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 없었다면
세상 두려움에 넘어질 수 밖에 없고
야이로가 죽은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본 것 같이 부활에 기쁨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써 하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중도에서 내 생각 내 기준 대로 되지 않을 때
자기생각에 보기 좋은 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그때 그날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내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고 기도 했다면
분명 나와 동행 하시는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기도 하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믿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인호 목사님 말씀 중에서)
“그르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 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혈루 증 걸린 여인이 12년을 앓았고 야이로에 딸은 12살이다
열두 해 동안 혈루 증 걸린 여인에 고통이 클까?
열두 살 딸을 바라본 야이로에 행복함이 클까?
열두 해 동안 혈루 증을 앓든 여인이 병 고침 받았을 때 기쁨이 클까?
열두 살 된 딸이 죽었다 살아난 야이로에 기쁨이 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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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여인에 믿음(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 그 여인을 살렸다면
그 시대에 회당장이 자신의 직위나 권위를 내려 놓고
나사렛 한 청년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 로 바라본 야이로에 믿음이(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딸을 살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보고 듣는 말씀이지만
귀한 목사님을 통해서 재 조명할 수 있는 기회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긴가 민가 하는 믿음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음을 확인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기준 되기를 원하는 기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하시는 말씀을
밝히 바라볼 수 있는 믿음에 종이 되게 인도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 합니다 – 아멘 -
2019/11/15 - 김 성 하 –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 절 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