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8장1~8 “복음을 위한일에 참여하는 삶” “환대”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 받다)
창17:15~2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의 사래는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여주인)라 하라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 하리오 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축복하시고 떠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할례를 행하고, 약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과 현실에서 변화가 없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문에 앉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약속하셨던 말씀을,
저버리고 살았던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었던 자신에게……
증표까지 주시고 축복의 말씀을 하실 때에,
그때에도 마음속으로 불순종했던(17절) 자신을 생각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정오 뜨거운 시간에 장막문에 앉아 상수리 숲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때에 갑자기 숲에서 나타난 세 사람을 보게 되었을 때
시름에 잠겨 있었던 아브라함은
나타나신(보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시니라)
세 사람을 보는 순간 아브라함에 마음은 뛸 듯이 기쁘지 않았을까?
그들을 바라본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영접했을까?
그 시대의 상황을 나름대로 상상을 하며 생각을 해 본다
창18:1~8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아 있다가
2절 눈을 들어 본 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 사오면, 원하 건데 종을 떠나가지 마옵소서
그때에 상수리 숲에서 보이지 않았던 세사람을 바라보게 된 ‘아브라함’ 은
자신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도에 응답과, 찾아 주심을 감사하며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 사오며 원하건데 종을 떠나 나가지 마옵소서”
이미 아브라함을 그 세 사람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았고
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오신 것을 생각하며
기쁨 마음으로 그들을 영접할 때
그 마음 속에는
다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없는 자신이 되지 말자고 마음으로 다짐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라보시고
그 마음에 시름이 있는 것을 아시고
언제나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은혜언약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 가실지 말씀하시고
그 시간까지 알려 주시고 있지 않는가?
((이 대목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었으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아브라함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도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성도 된 우리들은(나는) 명심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8장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 게로 돌아 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실 때
17장 17절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실수를 18장13절에서 아내 사라가 하고 있지 않는가?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믿으며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과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렸던 자신을 생각하며
얼마나 초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을까?
그 때에 아브라함을 찾아 주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세사람을 맞이했을까 상상을 해 본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내 사라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사라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일이 있겠느냐” 하시고
믿고 기다리 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입술로는 고백을 하면서도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나,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때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된 ‘나’ 또한 사라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수없이 많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실낱 같은 믿음이 남아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
믿음 없는 세대에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시고
나의 마음그릇이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날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 게로 데려 오라하시매”(마9:19)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믿음에 확신이 없었거나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행위로
자신의 의지로 행하고자 했던 제자들의 행동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마9:23) 하시고
제자들을 위로 하시는 예수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 믿음은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얻게 되는가?
생각해 본다, 창세기 22장1~18 ‘하나님께서 지시한 ‘모리아’ 땅 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독자 아들 이삭을 번재물로 바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복에 복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세를 훌쩍 넘긴 자신에게 이삭을 허락하실 때
사람의 생각으로는 환경과 처지로는 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일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사람의 생사 화복이
창조 하시고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음을 깨닫아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브라함의 고백이 주신이도 여호와 시요 거두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시며
사람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이도 하나님 이시며
인생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이도 하나님 이신 것을
순종의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을 볼 수 있지 않는가?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 하시리라 하고 두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22:7.8)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어떻게 받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권능에 손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 가시는 과정을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을 하고 있지만
일상의 삶에서 육신으로 부딪쳐 오는 일들은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고 원하는 일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느껴지고 있지 않는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삶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그 삶속에서 자기 중심 적인 삶을 살아온 것을 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믿음의 마음그릇이 사람의 생각으로 채워져 온전 하지 못했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그릇을 채워 주시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지 않는가?
아브라함의 마음 그릇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언약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가득할 때
아브라함을 통하여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는가?
오늘 하나님을 믿는 믿음아래 성도로 살아가는 나의 마음 그릇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믿음으로 가득한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잠8:17)
성도로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인지,,
성도로 살아가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이세상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위해
하나님께 구할 것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9.10)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분명하게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지 않는가?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영광 받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 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것을 보여 주신 것 같이
우리들의 삶속에서 개입하고 계시며
그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며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기를 원하는 기도와 행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말씀안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안에 살아가는 삶이 되지 않을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생사 회복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자 하심을 깨닫았을 때
자신의 모든 삶을(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맡기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주일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깊이 묵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에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브라함이 올바르게 이해하기까지
대략 25년에서 30년이 걸리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된다
창12:1절“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 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지라,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 하신지라”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복에 근원이 되리라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브라함은 자신을 창대 하리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더 많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삶속에서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물어 가로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할 때가 많았음을 또한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러한 삶을 바라볼 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아 알기까지 시간은 참 길고도 긴 여정이 아니었는가?
사람이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을 하지만 그 행함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을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창22장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9~14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 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어떤 주석에는 이삭의 나이가 9세가 되었다고 한다
온전히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고 결박을 당하는 아들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음과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내어 놓은 아브라함의 심정과
그 광경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름대로 생각하며 하나님에 뜻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난다(마18:1~7)
일련에 일들을 겪으면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은 나이가 백세가 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세상나이가 백세가 되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어린 같은 순수한 믿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는가?
택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
의로운 병기로 거듭나기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기다림이 어느때 까지일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영문밖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기쁨으로 달려 나아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여 오시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영문 밖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
마25:1~13 열 처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네 영혼이 깨어 있어라 말씀하시고 있지 않는가?
눅12:34~37“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이 적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상수리 나무 숲에서 나타나시는 세사람을 보고 “환대”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으나(창18장)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소돔’ 성 사람들은 두 천사를 영접하였으나
빨리 떠나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지 않는가? (창19장)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환대하는 모습은 내가 은혜안에 있을 때의 모습이 될 수 있고
소돔 백성들의 행위가 내 마음속에 세상욕망으로 가득할 때 행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종이 깨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며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의 종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에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믿음의 종으로 살아 갈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 멘 -
2022/12/15 - 김 성 하 -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